도묘필기 시리즈에서 각 배역에 너무 잘 어울렸던 증순희, 류우녕, 진초하 배우가 드라마를 찍는다는 소식에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드디어 티빙에 설영웅수시영웅이 올라와서 시청하게 되었다.
설영웅수시영웅은 '영웅을 말하다'라는 뜻이다. 원서안이 쓴 동명의 무협소설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다.
대략의 초반 줄거리는 주인공 왕소석은 어느 고수의 유일한 제자이다. 어릴 때 부모가 살해당한 후 사부와 함께 산에서만 자라 세상물정을 모르는 순수한 청년이다.
강호에는 육분반당과 금풍세우루라는 두 개의 큰 세력이 있었다. 금풍세우루에 침입한 육분반당의 스파이 리스트를 사부가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왕소석을 통해 금풍세우루에게 전달하려고 했다. 왕소석이 그 리스트가 든 상자를 들고 산에서 내려오면서 강호의 무리들이 그것을 빼앗기 위해 싸우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왕소석은 무명의 백수비와 금풍세우루의 후계자인 소몽침을 만나게 되었고, 어제 티빙에 올라온 12화까지 셋이 목숨까지 걸며,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인연을 쌓고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대 없이 그냥 배우들만 볼 생각이었는데, 무협을 표방하고 있지만 메시지는 심오해 보였다.
1화에서 그 리스트가 든 상자를 받기로 한 사부의 친구였던 접선인은 과거 영웅이었지만, 현재 아내와 아이가 인질로 잡혀있어 왕소석을 속여 그 상자를 빼돌린다. 결국 죽음에 이르는데, 막 산에서 내려온 왕소석은 그를 탓한다. 하지만 영웅이라는 타이틀이란 것이 가족을 지키려 한 것보다 더 이상의 가치는 없는 것이다.
육분반당의 최고의 고수도 막강한 권력의 찌질한 사이코패스 정치인 앞에서는 그의 눈치를 봐야 한다.
어린 왕소석과 백수비가 마치 영웅인 것처럼 전면에 나서서 문제를 해결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 뒤에서 보이지 않게 소몽침과 금풍세우루가 깔아놓은 스파이들이 열일하며 다 해결하고 있다.
완결까지 본 것이 아니라서 아닐 수도 있지만, 스파이가 대략 누구인지 중간중간 눈치를 채게 된다. 왕소석과 백수비의 눈에는 그들이 비굴해 보이지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바둑판처럼 그들은 몇 수를 보고 행동하는 중이다.
영웅은 따로 없다는 이야기같다. 두 주인공이 영웅으로 성장하겠지만, 이 외에도 그 두 주인공이 어려움에 처할 때 그들을 지켜주는 사람, 가족을 지키는 사람, 사패 밑에서 비굴하게 사느니 배신하고 잠시나마 소소한 일상을 누렸던 사람 등등 모두가 영웅처럼 보인다.
어리지만 무공이 강하고 정을 중시하며 욕심이 없고, 순수하다. 증순희 배우가 눈망울이 커서인지 이런 캐릭터에 잘 어울린다.
왕소석이 최강 무공을 가진 관칠을 업고 뛸 때가 정말 코믹했다. 그의 캐릭터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만류검으로 검기를 방출하며 한 발 한 발 디딜 때, 화면구성이 너무 멋졌다.
백수비는 자존감이 강하고 욕망이 크며 잔혹한 면이 있다. 그리고 12화까지는 상황파악과 결단도 잘한다.
가수이자 배우인 루우녕이 백수비를 맡았다. 그는 종극필기에서 쪼개는 미소의 흑안경 역으로 너무 잘 어울렸고, 평소 라방에서 그는 미소 띤 눈웃음이 매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진지한 분위기는 여전히 어색해 보인다. 그의 노래는 마음을 울릴 정도로 정말 환상적이지만, 연기력은 아직은... 그래도 무명에서 탑가수가 되었듯, 그의 노력이라면 몇 년 안에 탑배우가 될 것 같다.
최고 무공을 가진 이 중 하나인 소몽침. 그는 진실하고, 정을 중시한다. 지병이 있어 30살까지 산다고 했으나, 현재 32살이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시간과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 뇌순을 사랑하지만, 아마도 거리를 두는 이유는 적의 딸이라기보다는 본인의 수명 때문인 듯하다.
중계의 흑안경이었던 진초하 배우가 소몽침을 맡았다. 이 배우는 대만 특유의 허세가 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선한 눈빛이 매력있다.
기대하지 않았던 뇌순이 가장 성장하는 인물인 듯하다. 고난으로 마음고생을 하지만 꺾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여주보다 더 매력적이다.
온유는 낙양왕 온만의 외동딸이며, 금풍세우루 주인인 소몽침의 사매이다. 중드 여주 특유의, 제멋대로 일을 저질러 말썽을 일으키는 주범이다. 로맨스가 들어가야 한다는 의무로 존재하는 캐릭터 같다.
육분반당의 대당주이다. 목이 거북목처럼 고정되어 있다. 초반에 이유는 나오지 않으나, 추측하건대 이름 생각 안나는 정치인이 고문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매우 침착한 성격의 지략가이다.
소몽침이 적비경이 있어 두 세력이 중립? 또는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할 만큼 세력의 균형에 기둥이 되는 존재이다.
적비경. 나에게 있어 그가 가장 영웅이지 않았나 싶다. 사랑의 범주를 넓혀주는 캐릭터이다. 그의 삶의 목적과 그 끝은 아름다웠다.
보이지 않게 세상을 조종하는 유교집단의 세력으로 들어가려고, 온갖 이상한 짓을 한다. 요즘 종종 보이는 배우인데 연기를 정말 능글맞고 얄밉게 잘했다.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이다. 최고의 고수들만 최고의 술을 마신다고 하는데, 이 술집은 고수들만 드나드는 곳이다. 고생 끝에 백수비는 금풍세우루의 2인자가 되었지만, 이 술집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일전에 그가 돈 없이 거리에서 팔리지도 않는 그림을 팔며 영혼이 말라갈 때 그녀가 그를 이곳에 데리고 왔기에 그들이 알아봤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술집은 백수비가 자신이 위로 올라갔음을 확인할 때마다 오는 장소가 되었다.
'영웅을 말하다'는 냉혹한 강호와 권력 간의 유착, 그 안에서의 생사와 애증을 다뤘다. 의상, 메이크업, 소품이 매우 세련되었고, 화면 톤도 고상하다. 대화의 의미는 무거우나 스토리 진행은 유머가 더불어 경쾌하기도 하다.
아마 인생을 조금 산 사람들이라면, 스토리 내면의 작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보면 볼수록 인생을 생각하게 만든다.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지만 선택하지 않고 살고 있는 것 같다. 권력이 허상이지만 또한 그 뿌리를 끊어내지 않으면 깊숙이 우리 삶에 스며들어 영향을 끼친다는 것. 그리고 왕소석은 문제의 본질을 알아차리고 끝을 끊어낸다.
정통 무협은 아니지만, 생각할 꺼리들이 많다. 삶에 대한 깊은 철학이 있다. 이런 작품을 좋아해서 원서를 찾아보니, 12권이나 된다. ; 이것도 아직 내 실력으로는 미뤄놔야겠지만 원작을 꼭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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